재미없는 책은 없다

리드맨 블루스 | 2008/07/11 11:19 | 호야

한때 책을 되도록 빨리 읽으려고 애쓴 적이 있다. 빨리 읽어야 다음 책을 읽을 수 있으며, 그래야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가만 생각하면 이것은 참 우스운 생각이었는데, 본디 책을 읽고자 하는 목적을 망각하고 단순히 양적 만족감에만 집착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치우"려고 하면 독서는 자연스레 재미없어진다. 재밌는 책은 언제나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아니라 옆에 쌓여 있는 책이 되고 마니까. 

요즘 나는 이런 루틴에 조금 빠져 있는 듯하다. 여름이라 신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온다. 책상 옆에는 서평을 쓸 책과 흥미를 가진 책과 업계종사자로 '읽어 줘야 마땅할' 책이 3단으로 쌓여 있다. '어서 이 책 읽고 저 책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의자 밑을 뱅뱅 돈다. 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책들(장르소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폐해 가운데 하나라고나 할까. 장르소설이라 부를 만한 책이 그다지 나오지 않았던 10년쯤 전만 해도 책의 형태를 가진 장르소설은 "무엇이든" 재밌었다. 하지만 그 책들이 지금 다시 출간된다고 생각하면 생존율은 글쎄,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양으로만 보면 지금은 음식을 더 많이 먹기 위해 먹은 것을 게우고 다시 먹었다는 로마 귀족과 다를 바 없다. 눈앞에 놓인 음식의 맛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꼼히 훑어 읽으면 재미없는 책은 없다. 한 부분 한 부분을 음미하면 MP3 사용설명서도 재미있다. 그렇게 읽지 못하니, 아니, 그렇게 읽질 않으니 재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그저 많은 소설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기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장점보다 단점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두꺼운 책보다 얇은 책을, 섬세한 감성보다 즉각적인 자극을 원하게 된다.

나는 책을 되도록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런 다짐은 일이 년에 한 번쯤은 꼭 하게 된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지나치게 가속도가 붙어 있게 마련이니까. 사실 재밌는 독서의 비법은 첫 부분을 느리게 읽는 데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고, 그것을 놓치면 재미도 흥분도 감동도 모두 놓치고 만다.

사실 첫 부분을 느리게 읽는 것이 책을 재밌게, 빨리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첫 부분에서 작가가 만들고 있는 작품의 세계상과 구조를 파악하면 뒷 부분의 이야기들은 쉽게 읽힌다. 문장 읽기가 아니라 문단 읽기도 가능해진다.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거니와 행간의 의미나 작품의 재미도 반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작품은 서로 다른 재미를 갖고 있다. 어느 한 작품의 재미를 다른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영혼의 메시지를 찾거나 판타지에서 세밀한 리얼리티를 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품의 재미를 미리 결정 짓지 않는다면, 지금 손에 들고 질질 끌고 있는 소설은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재밌어질 수 있다. -虎-

2008/07/11 11:19 2008/07/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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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놀이기계 2008/07/11 11:54

    "첫 부분을 느리게 읽는 것이 책을 재밌게, 빨리 읽는 방법"이란 말씀, 인상깊군요. 그러고보면 언제나 책을 대할때는 첫 부분을 빨리빨리 넘기고 중간을 지나 어서 빨리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책읽는 자세를 반성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마팔다 2008/07/14 09:11

    존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 골목>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첫 부분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구요. 호야님이 쓰신 글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이요. 책의 감동을 마구 뿌리고 있는 중인데 딱 제 감상에 맞는 글을 만나 반갑네요.

  3. 감은빛 2008/07/23 18:28

    좋은 말씀, 공감합니다! 'MP3 사용설명서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말씀은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진짜 지루한 책들은 아무리 재밌게 읽어보려고 해도, 책만 펼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책이 가끔 있더라구요.

    • 호야 2008/07/25 12:11

      지루하지 않은 책이 왜 없겠습니까. 각자의 취향이라는 것도 있고 말이죠. 다만, 그렇지 않은데도 이상한 '의무감'이랄지 조급함 때문에 재미를 놓치는 책들이 있어서요.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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