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주스 아가씨와 나
대학 시절, 동문 동기(하지만 학년 선배)의 소개로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을 했다. 지금이라면 하루 재밌게 놀다 들어오거나 친구 하나 사귀는 셈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길 공력(?)이 되지만 그때만 해도 미팅이니 소개팅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대체 처음 만난 사람과, 그것도 이성과 무슨 얘기를 나눈다는 말인가. 그래서 몇 번이나 소개팅을 만류하였으나 동기의 끈질긴 권유에 실례다 싶어 딱 한 번만이라며 나간 자리였다.
제발 수다스러운 상대이길 바랐지만 동기가 나와 맞는 성격을 부러 찾기라도 했는지 참하고 말수 없는 아가씨가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적당히 ‘호구 조사’를 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던 것 같다.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은 뒤 그냥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싶어 까페에 들어갔다. 보통은 주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숍이 아닌 이런 종류의 까페는 거의 와보지 않았던지라 뭔가 다른 음료를 시켜볼까 하던 차에 체리 주스가 눈에 들어왔고, 그걸 마시기로 했다. 상대 아가씨도 똑같이 주문했던 것 같다.
체리 주스는 맛이 없었다. 날은 후텁지근한데 들척지근한데다 밍밍한 체리향은 기분만 더 끈적끈적하게 만들었다. 시원하지도 않아 어지간해서는 눈앞의 음식을 다 해치우는 나인데도 삼분의 일쯤 남기고 일어섰다. 헤어질 때는 예의상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며칠 지났을까, 소개팅을 주선한 동기가 왜 연락하지 않느냐며 가볍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어쩌고 하며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쉬워하는 동기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친구들에게 우연히 들은바, 소개팅과 미팅 자리에서 ‘체리 주스’는 상대에게 호감이 있다는 무언의 표시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아뿔사, 싶었다.
상대가 체리 주스를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동기의 눈치를 보아 하니 내게 호감을 가지긴 한 듯싶지만 어쩌면 나처럼 동기에게 떠밀려 뜨뜻미지근한 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 뒤로 가끔씩 들큰하고 밍밍했던 체리 주스를 떠올린다. 역시 나는 이를 울릴 만큼 단단하고 단박에 침이 고이는 레몬 과자가 더 좋다. 점심이 지나 에어컨을 잠시 끈 사무실에서 살갗에 들러붙는 텁텁한 공기를 부채로 쫓으며 기대 앉아 있자니, 그때의 체리 주스 아가씨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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