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주스 아가씨와 나

7월 2일, 2009년
사진 : Crystl(http://www.flickr.com/photos/crystalflickr/1031526479/)

사진 : Crystl(flickr.com)

대학 시절, 동문 동기(하지만 학년 선배)의 소개로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을 했다. 지금이라면 하루 재밌게 놀다 들어오거나 친구 하나 사귀는 셈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길 공력(?)이 되지만 그때만 해도 미팅이니 소개팅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대체 처음 만난 사람과, 그것도 이성과 무슨 얘기를 나눈다는 말인가. 그래서 몇 번이나 소개팅을 만류하였으나 동기의 끈질긴 권유에 실례다 싶어 딱 한 번만이라며 나간 자리였다.

제발 수다스러운 상대이길 바랐지만 동기가 나와 맞는 성격을 부러 찾기라도 했는지 참하고 말수 없는 아가씨가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적당히 ‘호구 조사’를 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던 것 같다.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은 뒤 그냥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싶어 까페에 들어갔다. 보통은 주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숍이 아닌 이런 종류의 까페는 거의 와보지 않았던지라 뭔가 다른 음료를 시켜볼까 하던 차에 체리 주스가 눈에 들어왔고, 그걸 마시기로 했다. 상대 아가씨도 똑같이 주문했던 것 같다.

체리 주스는 맛이 없었다. 날은 후텁지근한데 들척지근한데다 밍밍한 체리향은 기분만 더 끈적끈적하게 만들었다. 시원하지도 않아 어지간해서는 눈앞의 음식을 다 해치우는 나인데도 삼분의 일쯤 남기고 일어섰다. 헤어질 때는 예의상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며칠 지났을까, 소개팅을 주선한 동기가 왜 연락하지 않느냐며 가볍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어쩌고 하며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쉬워하는 동기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친구들에게 우연히 들은바, 소개팅과 미팅 자리에서 ‘체리 주스’는 상대에게 호감이 있다는 무언의 표시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아뿔사, 싶었다.

상대가 체리 주스를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동기의 눈치를 보아 하니 내게 호감을 가지긴 한 듯싶지만 어쩌면 나처럼 동기에게 떠밀려 뜨뜻미지근한 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 뒤로 가끔씩 들큰하고 밍밍했던 체리 주스를 떠올린다. 역시 나는 이를 울릴 만큼 단단하고 단박에 침이 고이는 레몬 과자가 더 좋다.  점심이 지나 에어컨을 잠시 끈 사무실에서 살갗에 들러붙는 텁텁한 공기를 부채로 쫓으며 기대 앉아 있자니, 그때의 체리 주스 아가씨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虎-

더.다이어리 ,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중〉, 미야베 미유키 책임편집

7월 1일,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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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중권, 미야베 미유키 책임편집,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2009

“인간이란 때로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는 일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더구나 당연히 무시받고 차별받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때로 그 무시와 차별의 높은 벽을 정신의 힘으로 넘어선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연수, <누리> 2009년 6월호, 상권 서평 중에서)

권이 나왔다. 미야베 미유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시작한 기획이지만 거듭해서 원고를 읽을수록 세이초에게 여사가 어떤 존경을 품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상권의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를 한국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일까 싶었는데 가장 처음 실린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 감명받은 독자부터 뒤에 실린 논픽션(한국사도 아닌 일본 현대사인데)에 대한 평가도 매우 좋다. 미야베 미유키의 책처럼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지만 제법 뭉근하게 독자 수가 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제는 중권에 실린 작품들이 너무 가볍지 않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중권에는 논픽션도 실려 있지 않고 전부 스토리 위주의 작품들이다. 중권의 콘셉트는 쓸쓸한 여자와 불쾌한 남자. 상권을 읽은 독자라면 깨달았겠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그릇 안에 담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그가 내디뎠던 한 걸음일 뿐, <점과 선>이나 <모래 그릇>과 같은 작품만 읽은 독자라면 부디 이 단편 컬렉션을 읽기 바란다.

조금 과장한다면 상권은 문학적 충격에 가까웠다. 한 사람의 작가가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이 솟는다. 중권은 이야기 본연의 재미로 가득하다. 어느새 나는 주인공의 눈과 귀와 발이 되어 그가 보는 것을 보고 그가 듣는 것을 듣고 그가 겪는 일을 겪는다. 별것 아닌 사건과 평범해 보이는 인물에서 빛이 흐른다. 인물 한명 한명이 모두 사랑스럽다.

작품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은 미야베 미유키다. 여사의 해설은 작품만큼 사랑스럽고, 작품의 재미 또한 몇 배는 끌어올린다. “호사스런 도시락”을 들고 세이초의 발자취 안에서 “색색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노니는” 여사의 해설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싱긋 미소를 머금게 된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지만 중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서예 강습’. 꽤 오래 서예를 배웠던 나는 소재만으로도 흥미가 동했지만 가와카미의 뒤를 쫓는 사이 어느새 가와카미가 되어 버렸다. 중편을 넘어 짧은 장편에 가까운 긴 호흡의 이야기를 자극적인 사건이나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준비하지 않고도 스릴러에 가까운 흥분을 맛보게 한다. 작품을 읽는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세이초의 작품은 한 걸음 물러서 읽게 되지 않는다. 가장 처음에 실린 ‘멀리서 부르는 소리’도 참 좋다. -虎-

※ 북스피어 블로그에서 소소한 이벤트도 진행중.

문학, 미스터리/호러, 화씨 451 , , , ,

<만만한 출판 제작>, 박찬수

6월 30일,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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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출판 제작>, 박찬수,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

“출판 제작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정확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수없이 실수를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제작 실수의 함정을 곳곳에 빠짐없이 담고 있다. 그것도 사진까지 곁들여서.

이 책이 다른 출판 제작 책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 강맑실(사계절출판사 대표)

제까지 몇 종류의 출판 제작 관련 책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작을 배우려는 편집자들이 가장 많이 들여다보았을 책은 <책 잘 만드는 책>(김진섭, 이미지박스, 2004/개정판 은행나무, 2008)이었으리라. “가장 많이”라고는 했지만 출판 제작 관련한 책은 한 손가락도 남을 지경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라나. 아쉬운 대로 제작의 껍데기를 핥을 정도는 되었으나 어느 정도 제작을 아는 편집자가 아니라면 크게 도움을 받기 힘든 내용이다.

그래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만만한 출판 제작>이 나왔을 때 조금 반가웠다. <책 잘 만드는 책>을 보완하여 초보 편집자부터 대충 실무 지식만 습득한 편집자까지 제작 시스템을 면밀하게 알려줄 책이 나왔으리라 믿었다. 확실히 이 책은 현장 실무에 초점을 맞춰 아기자기한 정보들을 많이 전달하고 있다. 다양한 예제 사진들도 실어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제작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실수들 또한 잘 짚고 있다. 그러나 <책 잘 만드는 책>과 똑같은 실수를 이 책은 저지르고 있다. 대상 독자가 어중간하다.

이 책은 실무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편집자들에게는 너무 헐겁고 초보 편집자에게는 불친절하다. 아는 사람이 보면 이해할 만한 설명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리둥절할 만한 부분이 많다. 더군다나 제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편집자라면 책의 순서부터 당황하리라. 뜬금없이 제책부터 시작해서 종이와 출력, 인쇄 등이 중구난방 흩어져 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으려면 제작의 흐름부터 알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어떤 과정을 밟아 가는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아무 설명 없이 당연하게 쓰이는 제작 용어들도 아쉽기 짝이 없다. -虎

책과 글쓰기, 화씨 451 ,

오늘의 독서일기

6월 11일, 2009년

§ 경품 고시 개정안과 관련하여 결국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나섰다. 15일에 성명을 발표한다는데, 개정안 시행일을 코앞에 두고 출판사와 온라인서점 등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왠지 두근두근)

§ 투르게네프의 『첫사랑』(펭귄클래식, 최진희 옮김)을 읽기 시작하다. 실은 『모비 딕』이 읽고 싶어 찾다가 펭귄클래식에서 나올 떄까지 기다리자 싶어 펭귄클래식 가운데 제일 얇은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고. 펭귄클래식은 편집이나 장정이 읽기에 집중하기 좋은 콘셉이지만 묘하게 행간에 비해 자간이 넓어 산만해 보인다.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펭귄클래식의 해설은 평가가 좋던데(출처 불분명) 『첫사랑』에 실린 서문은 정말 유익하구나.

§ 원고 때문에 란포를 다시 읽으려 『외딴섬 악마』(동서미스터리북스)와 『음울한 짐승』(동서미스터리북스)을 주문했다. 『외딴섬 악마』는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찾지 못했고, 『음울한 짐승』은 읽은 줄 알았는데 읽지 않은 작품이더라. 전단편집 2권이 6월 말에 드디어 나온단다. 한정 양장본 제작 이야기가 있던데 이미 1,3권 산 사람은 뭥미. T_T

§ 만세! ヽ(*´∀`)ノ 이제까지 알라딘을 쓰면서 ttb 리뷰에 당첨되기는 처음..;; 무려 5만원의 적립금이 생겼다. 그나저나 전에 얘기했던 배송 문제도 급해결되었다는 추군의 이야기. 혹시 알라딘의 누군가 글을 읽고……!!!(゜Д゜);;;; -虎-

리드맨 블루스 , , , , , , ,

당신을 일본 미스터리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6월 10일, 2009년

일본 미스터리 절대 읽을 필요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시면 됩니다.

일단 일본 미스터리 전문가가 되기 위해 추앙해야 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고전 작가들 중에서는 요코미조 세이시나 에도가와 란포를 꼽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꼽는 것은 다른 미스터리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작가는 모리무라 세이치나 마쓰모토 세이초 정도입니다. 언제 사람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책 한권 안 읽어도 됩니다.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는 온다 리쿠보다는 미야베 미유키를, 요코야마 히데오보다는 기리노 나쓰오를 추앙해야 합니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교고쿠 나쓰히코를 추천합니다.

다른 거장 중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타겟으로 잡고 오락 소설에 껍데기뿐인 미스터리라고 비판하며 시마다 소지를 추앙하십시오. 하라 료는 조금 애매한 위치군요. 다카무라 가오루를 추천합니다. 스스로는 추리 작가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습니다. 다카무라 가오루를 추앙하십시오.

라이트노벨이나 청소년 미스터리는 안 됩니다. 묵직하고 읽기 힘든 사회파 미스터리 강추. 또는 편협하다고 욕먹어도, 곧 죽어도 본격 미스터리, 서술 트릭. 이 정도가 좋습니다. 걍 댓글마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리스트 올랐네 ㄷㄷㄷ 하시면 됩니다. 출판사 게시판에 가서는 무조건 4대 기서 언제 내주나요, 하시면 됩니다.

대충 이 정도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쿠다 히데오 때문에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 당합니다……

당신을 ㅇㅇ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에서 트랙백. 크하하 -虎-

덧. acrobat 님의 서양 미스터리 편. 킥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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