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시대에 책표지의 정체성은 어디로?
아이폰 출시 이후, 아이패드 출시 소식은 전자책 논의 속도에 불을 붙인 듯하다. 트위터에서도 전자책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다. 가끔은 조금 무섭기까지 할 정도다. 한편으로, 이미 책보다는 휴대전화나 PMP 등의 전자 기기에 익숙한 십 대와 이십 대를 생각하면 전자책이 일반화되는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이제 바깥에서 ‘책’을 들고 읽는 풍경은 없어지는 걸까?
<뉴욕타임스>에서 다가올 전자책 시대의 책표지 정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모토코 리치)를 읽었다. 물리적인 의미의 책이 기기에 실리는 ‘콘텐츠’(우리는 그것을 전자책이라 부르고 있지만)로 바뀌고 나면 더 이상은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이 무슨 책을 읽는지 기웃거리기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다른 사람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텐데, 표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일부만 보고 책을 알아맞히는 혼자만의 놀이를 즐겨 본 이도 적지 않으리라. 가끔은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종종 그랬다.) 동료의 책상에 놓인 책을 보고 무슨 책인지 묻거나 추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전자책이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책표지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종이와 잉크 냄새를 좋아하고, 책장을 넘기는 감촉을 그리워하며, 조금씩 때가 묻어가는 책의 흔적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독자라면 이런 사실을 안타까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책은 디지털화된 종이책이 아니다. 현재의 전자책 기술은 종이책이 갖고 있는 감수성에 어떻게 하면 더욱 근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이책과 전자책은 라디오와 텔레비전만큼이나(아니면 죽간[竹簡]과 현대의 종이책만큼이나) 다른 매체다.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이 읽는 책을 힐끗거리는 풍경은 아마 이런 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아이패드(아니면 다른 어떤 기기든)를 들고 책을 읽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읽고 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뭘 읽는지 궁금해져서 ‘무슨 책 읽니?’ 어플을 실행한다. 이 어플은 거리를 설정하여 그 반경 안에서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또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최근에 읽은 책이나 읽을 예정인 책도) 책표지와 함께 사용자의 짦은 감상까지 보여준다. 궁금한 게 있다면 해당하는 책에 질문을 남기고 답신을 받을 수도 있다. 증강현실 옵션을 사용하여 앞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의 책을 스크린에 바로 띄워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읽는 책을 그저 훔쳐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감상을 공유할 수도 있다. 출퇴근길 책 친구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낭만도 생기지 않을까…… -////- 실제로 이와 비슷한 아이폰 어플리케이션(레이어나 스캔 서치 같은)은 제법 많다.
두루말이나 죽간은 수납하거나 운반하거나 서로 펼쳐 놓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불편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발전을 거듭해 펼침 페이지라는 정보 편집 형식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이 포맷은 1,000년 이상 변치 않았습니다. 또 이 포맷을 채용하자 비로소 책등만으로도 중요한 정보를 발신하고, 책과 책이 서로 링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책장에 책을 정리할 때도 이런 정보의 하이퍼링크를 염두에 두고 배열합니다. 책장에서 책을 찾을 때도 이렇게 나열되어 있는 책등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체, 색상, 두께, 뉘앙스가 모두 포함됩니다. 마치 사람의 인상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디자인은 책의 인상을 결정하고 기억하고 재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마쓰오카 세이고, 김경균과의 대담,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281쪽)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책의 형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를 품고 있다. 단순히 읽기 편한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정리할 때의 유용성이나 책의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아주 섬세한 발전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특이하게도, 천 년이나 지속되어 온 이러한 책의 형태 중에서도 펼침 페이지라는 형태를 전자책 단말기 또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대부분의 전자책 단말기는 한쪽 면만 보여주는 형태가 대부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애초에 전자책을 사용하는 의미가 없어져 버리지 않나?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 인터넷 서점 아마존과 함께 진행했다는 재밌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학생들에게 교과서 대신 전자책 단말기(아마존 킨들)를 나눠주고 수업한 결과, 아주 만족한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책에 직접 필기할 수 없다는 점과 여러 책을 동시에 펼쳐 놓고 공부할 수 없다는 점이 불편했다는 의견이 기억에 남는다. 이 프로젝트가 말해주는 바는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종이책의 경험과 전자책의 경험은 달라져야 하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당분간 전자책은 종이책을 따라다닐 것이다. 인쇄물과 비슷한 수준의 출력 형태를 고민할 것이고, 종이책 표지는 그대로 전자책 표지로 쓰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전자책이 종이책에 근접해지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하는 시대가 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책은 어느 순간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지점이 올 것이다*1.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의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게 되리라. 그러니까 출판사들도 그저 쿽 파일이나 인디자인 파일을 각 기기에 알맞은 형식으로 변환하는 일이 전자책 사업의 전부라고 단순하게 인식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전자책은 종이책과 같은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기획이다. 또 다른 단행본이다. 출판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의 전자책 시장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는 편집자 1인 -_-)
-虎-
- 실제로 이런 작업은 꽤 진척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독일의 한 연구소가 개발하고 있다는 ‘텍스트 2.0’이라는 기술은 앞으로 전자책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안내 동영상을 보면(링크된 기사에 포함) 시선 추적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 2.0은 전통적인 책읽기 방식 자체를 아예 바꾸어 버린다. 아직까지는 너무 비싸고 너무 커서 당장 생활 속으로 파고들기 힘들지만 이런 기술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울 따름. (애플은 벌써 시선 추척 유닛까지 사들여 특허권을 확보하고 하드웨어에 이식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가까운 미래에 아이패드에 적용될 듯.) [↩]


음음음. 재밌었다.
전자책에 대해 생각은 해 보지만 확실히 아직은 잘 모르겠더라고. 다만 네 말처럼 전자책은 그 자체로 온라인 소통이 가능하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종이책과는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새로운 걸 만들어서 자체 발전할 수 있겠다 싶기는 해. 그걸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듯하고.
그래도 표지의 운명은 안타깝지 않아? 전자책에서 달리 쓰이는 법이 나타나기야 하겠지만. 책제목 맞히기 놀이도 혼자 하는 놀이로서는 꽤 즐거운 일이고.
하지만 되돌아와서, 만드는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자책 제작에 접근해야 할지는 역시 어렵구려. 흠.
글 잘 읽었습니다. RSS로 구독하는데 새글이 오랜만에 떴네요. 이런 양질의 블로깅, 저 같은 범인을 위해 좀더 자주 해주십쇼. ^^
@JIYO
물리적인 책이 사라지면 여러가지 사라지는 ‘재미’들이 있겠죠. 그것들이 차지하는 공간 때문에 생기는 즐거움(책에 둘러싸여 손에 집히는 책을 읽는다든지) 또한. 하지만 변화가 생기면 그에 따르는 아쉬움은 늘 존재하니까, 뭐. “완벽한” 전자책이 나온다 해도 종이책이 아주 없어져버릴 것 같지도 않고.
@junn
아이쿠, 이 게으른 블로그를 아직까지 구독하는 분이 계시군요. (아마 구독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셨겠지요…..) 양질은 모르겠지만 자주는 올리겠습니다. (이 말은 하도 자주 해서 이제는 스스로도 믿음이 가지 않는 oTL)
책과 전자책은 전혀 다른 별개의 매체로 굴러갈 거 같아요. 전자책이 활성화되면 종이책의 영역을 어느정도 잡아먹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 별개로 계속 나아갈게 분명합니다. Video kills a radio star를 불러제꼈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비교적 잘나가고 있는 것처럼요.
게다가 종이책은 한번 사면 계속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전자책은 보는 기기에 따라서도 다를테니 언제 어디서나 보는데는 오히려 어느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킨들로 보는가 아이패드로 보는가에 따라 포맷도 다를꺼고…일단 한 번 구입한 전자책 포맷이 몇 년 후에는 아예 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거구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플랫폼이 같고 그것이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지속되어간다면 좀 낫겠지만 그래도 별로…
아이폰에서 Stanza로 책을 두 권쯤 읽고 있는데 사실 별로에요. 그냥 짬짬이 가끔 읽기에만 좋지…물론 그게 어플의 한계 혹은 아이폰의 작은 화면의 한계일수도 있지만, 여튼 전자책은 종이책과 아예 다른 것으로 접근해야 할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