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편집 기계 – 세바스티안 라이트너, <공부의 비결>
게으른 학생이 그렇듯,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공부하는 방법과 계획 짜기를 즐겼다. 특히 공부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여러 책들을 읽기도 했고 친구들끼리 서로의 방법들을 알려주기도 했는데 그때 배운 것인 ‘삼색 볼펜법’이라든지 ‘삼지법’*1 이라거나 ‘호텔방 암기법’*2 같은 공부법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읽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막상 실전에 적용하면 쓸모없거나 활용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나 뭐, 읽는 당시에는 이렇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위로용(겸 기분 전환용) 학습서로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니까.)
지금도 나는 뭔가를 공부할 때 뜸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공부법 책을 찾아다니며 읽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이며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지 이리저리 재고 따진 뒤에야 시작한다. (계획만 세우고 시작을 못할 때도 종종 있다.) 얼마 전부터는 이번에야말로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해 보자고 마음을 먹고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S님이 라이트너 카드법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고 솔깃하여 검색하던 중 <공부의 비결>을 발견했다. (또 이럴 줄 알았어.)
라이트너 박사는 소질이 없고 머리가 나쁘다며 아이들을 무조건 윽박지르는 어른들 때문에 화가 나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사람의 두뇌란 아이든 어른이든 차이가 없으면 ‘적절한’ 조건만 갖추면 누구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한 지식을 습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끄집어 내는 기술만 익힌다면 완전히 망각되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뒤죽박죽이 된 뇌 속을 정돈하는 기술이다.
<공부의 비결>의 중심이 되는 ‘라이트너 학습법’은 암기해야 할 내용을 카드에 적어 반복하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학습이다. 카드를 몇 개의 구획으로 나뉜 상자에 넣고 외운 카드는 뒤쪽 구획으로, 못 외운 카드는 앞으로 보낸다. 외운 카드를 불필요하게 남겨 두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반복을 줄이고, 못 외운 카드는 더 많이 반복하게 되어 효과적으로 내용을 암기할 수 있다. 다섯 구획으로 나뉜 상자에서 카드를 꺼내 암기하는 방식은 놀이처럼 느껴진다. (자세한 학습법에 대해서는 여기나 여기 또는 여기를 참고.)
이 학습법의 핵심은 공부할 내용을 가능한 한 잘게 나누는 데 있다. “종이 두 장은 한 장보다 낫다.” 열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을 외우려면 열 개의 카드를 만들라는 말이다. 통째로 외우는 일은 학습자에게 부담도 크고 의욕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이런 암기 방식은 어쩌면 ‘창의적인 사고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도 무조건적인 암기는 공부에서 멀어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어릴 때는. 그래서 그냥 외우면 편한 수학 공식도 문제에서 유도해서 풀고, 생물이나 지학 ‘따위’는 과학으로 치지도 않았다. (난 그래서 학력고사에서 물리-화학을 선택한 몇 안 되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외우기 싫었던 게지.
하지만 라이트너 박사도 말하듯이 ‘통찰’이나 ‘깨달음’도 정보의 일종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 학습에 있어 뇌 안에 든 지식의 즉각적인 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뭐가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책을 뒤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더 어려워했던 까닭 가운데 하나도 암기에 부정적인 탓이었을 것이다.
‘라이트너 학습법’은 지금까지도 꽤나 유명한 공부법으로, 각종 도구에 활용되고 있다. 일본어 어휘를 늘이기 위해 내가 사용하고 있는 암기 카드 어플 ‘Flashcards’에서도 정렬 옵션 중 하나로 라이트너법을 채택하고 있다. 아예 라이트너 학습법을 기반으로 한 jMemorize라는 PC용 프로그램도 있단다.
<공부의 비결>은 단순히 학습 방법만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은데, 학습법의 바탕이 되는 심리학적인 학습 원리라든지 학습에 따른 인식의 차이 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어 자신의 공부법을 찾지 못한 독자라면 읽어 보길 권한다.
갖가지 공부법을 섭렵한 독자로서(엣헴) 말하자면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학습법이든 공통점은 학습자의 ‘편집’ 의지를 요구한다는 것. 라이트너 학습법도 결국은 뒤죽박죽으로 흩어진 내용들을 잘게 쪼개어 머릿속에서 새롭게 정렬하는 편집 과정이다.
뛰어난 기억을 지닌 사람들을 보면 대상을 이미지화시켜 연결고리를 가진 구조물을 만들고는 하는데, 역시 무의미한 정보를 가공하여 자신에게 의미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편집술이나 다름없다. “칼칼나마”*3로 시작하는 이온화 경향 암기법이나 “8213(빨리일산)”이라고 적힌 일산 콜택시 전화번호도 기억을 돕는 편집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너 학습법은 훌륭한 공부 방법이지만 직접 카드를 만들지 않으면 소용없다. 아주 잘 정리된 남의 공책으로 공부할 때보다 엉터리로 정리한 내 공책으로 공부할 때가 더욱 효과적이다. 공부 내용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과정과 과정에 대한 고민 자체가 공부다.
-虎-
- 엄지와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을 하나로 모으고 암기하는 방법이다. 사람의 뇌는 암기 대상뿐 아니라 환경까지 한꺼번에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러한 특정 환경이나 조건을 ‘삼지’를 통해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암기한 내용은 똑같이 조건화된 환경 ? 즉, 손가락을 모은 ? 을 만들어줌으로써 뇌 속에서 활성화된다…는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 하하 [↩]
- 머릿속에 호텔의 방들을 떠올리고 암기해야 할 것들을 방에 하나하나 집어넣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몇 안 되는 목록을 기억할 때는 의외로 효과가 있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 [↩]
- 칼칼나마알아철니주납수구수은 [↩]


어쩐지 뿌듯(;;)합니다! ^^; 사실 전 책까지 알아보기는 했지만 일단 책 대신 단어장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멈춰있지요 -_-)
단기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꾸준한 반복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어휘가 잘 늘지 않아요. (하긴 우리말도 계속 안 쓰면 단어가 제한적이 되는데 외국어가 오죽하겠습니까 ^^; ) 그나마 매일 수업을 들으니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조금씩 늘어가고 있지만, 쓰지 않으니 거의 문맹 수준이랍니다. ^^;
참, 호텔방 암기법을 보니, “무한개의 방이 있는 호텔에 N명의 손님을 새로 투숙시키는 방법”이 떠오르네요 ^^
책이 귀해 교수가 하는 말을 받아 적는 게 ‘강의’였던 중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중요한 서적을 모두 암기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 시절에 어떤 방에 사물을 배치하면서 외워야 할 것을 연관시키는 상상을 하는 암기법이 만들어졌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습니다.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많은 부분이 실전(?)된 기술이라고 하더군요.
아, 나 이거 읽으면서 안 그래도 마쓰오카 세이고 생각했어. 결국 근본은 같지 않은가, 나머지는 세부 사항을 어떻게 정하고 실천하는가에 달린 게 아닌가.
그래서 실천 중?
@smfet
흐흐. 뭘 하든 “어떻게” 하느냐보다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책 읽고 고민하는 사이에 일본어 공부했으면 초등 교과서 정도는 벌써 읽어 치우고도 남았을 것 같아요. -,.-
@永革
그렇군요! 그런 암기법은 현대에 와서 개발된 줄 알았더니. 그러고 보면 책이 귀하던(없던) 시대의 지성과 요즘처럼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시대의 지성은 꽤나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옛날에는 ‘깊이’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넓이’로 기울어진다고나 할까.
@JIYO
학습 카드는 제 취향이 아닌지라. 글에서 얘기했듯이 아이폰 어플로 일부 ‘활용’하고 있긴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