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에 읽은 책

《미스테리아 50호》에 리뷰를 쓰기 위해 읽은 『매구를 죽이려고』는 미스터리 독자 입장에서는 좀 아쉬운 작품이긴 했다. ‘매구’란 여우가 천 년을 살면 변하는 일종의 최종체인데...

2023년 11월에 읽은 책

《미스테리아 50호》에 리뷰를 쓰기 위해 읽은 『매구를 죽이려고』는 미스터리 독자 입장에서는 좀 아쉬운 작품이긴 했다. ‘매구’란 여우가 천 년을 살면 변하는 일종의 최종체인데 『매구를 죽이려고』는 이 매구 전설이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전설은 이렇다. 마을에는 매구 호수가 있고, 그곳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매구가 구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설을 믿으면 죽는 사람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게 될 수도 있다. 만약 구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의 호수에 소녀가 한 명 익사한다. 그리고 12년 후 매구 호수에 비슷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주인공이 이 마을로 이사를 오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시에 살인도 벌어진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설정인가. 타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딜레마라니 이것을 어떻게 미스터리로 풀어낼까 하는 흥분 탓에 조금 실망했다. 초중반의 이야기가 전설과 괴담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안고 있고 그것들이 산만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질서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작가의 필력이 좋은 데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지만 주인공의 과거가 현재의 사건과 연결되는 부분이라든지 매구의 정체를 쫓는 과정은 스릴러로서 충분히 몰입도를 높인다. 독자와의 ‘페어 플레이’도 좋아하지만 이런 식의 초자연적 현상이 결합된 미스터리도 매우 좋아하는 나로서는 뜻밖의 작품을 만난 기분도 잠시 들었다. 다만, 이 작품은 미스터리라기보단 미스터리를 품은 이야기성 좋은 민속 호러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간 판타지성 높은 작품을 선보였던 조선희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미스터리성이 강하게 느껴지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독서 모임 책으로 읽은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책의 첫인상은 디자인에서 결판이 나는데, 솔직히 전반적인 책의 만듦새는 독자에게 그다지 신뢰를 주는 모습은 아니었다. (편집자의) 눈에 띄는 오류나 실수도 그렇고. 데뷔작이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마음을 내랴놓게 만드는 요소였는데, 그래도 ‘명탐정’이니까!

하지만 생각하는 종류의 명탐정은 아니었고, 작품 분위기도 예상과는 (기분 좋은) 불일치.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루이소체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과 손녀가 주인공인데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루이소체 치매의 특징을 잘 살려 미스터리와 결합한 것도 그렇고, 곳곳에 깨알처럼 보이는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애정 또한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희생한 개연성도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밌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구체적인 감상은 따로.

독서 모임으로 읽은 또 한 권의 책은 『예언의 섬』은 또 다른 의미로 뜻밖의 전개였다. 사와무라 이치의 ‘히가 자매’ 시리즈를 좋아하는 터라 시리즈 외의 작품은 어떨까 기대가 컸는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중후반 이후를 위해 스토리를 구상한 작품이다. 사실 중반 정도 읽을 때까지는 평범하게 재밌는 공포소설 같았고, 의외로(?)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이 드러나지 않아 조금 실망했다. 결말부의 첫 번째 진상에서는 다소 맥이 빠졌고, 두 번째 진상이자 작가가 마련한 진짜 결말에 이르러서는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감상을 적을 텐데, 함께 읽은 지인은 불공정한 트릭이라며 다소 부정적이었지만 확실히 불공정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오랜만에 본 참신한 발상이라 나는 긍정적인 면이 더 컸다. 아무튼 전작과 색깔이 전혀 달라서 좀 찾아봤는데 작가가 도전한 첫 번째 본격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대충 납득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을 쓴 작가의 신작 『제목을 밝힐 수 없는 본격 미스터리』는 초기의 걸작 이후로는 이렇다 하게 인상에 남는 작품은 없었는데, 평작의 재미는 주겠거니 싶어 그리운 마음에 읽었다. 하지만 완전히 녹이 슨 것일까. 트릭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잡은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개연성도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스토리의 재미도 반감했다.

반면 기시 유스케는 초기작이 지금도 훨씬 인상적이긴 하지만 나오는 신작들도 꾸준히 읽을 만하다. 이번 단편집은 미스터리 장르는 아니고 살짝 란포 느낌이 나는 기담류. 언젠가 『우게쓰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는 그간의 작품들과 달리 사적 취향을 많이 반영한 느낌이 든다. 호러 스릴러나 미스터리를 기대한다면 조금 심심할 테지만 필력이 좋아 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좋다. 「아귀의 논」처럼 실재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아귀’라는 존재는 재해석한 단편도 좋았고, 「푸가」에서는 마지막 발상이 신선했다. 「고쿠리상」의 설정은 내가 좋아하는 종류였는데 고쿠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재밌었지만 그것을 진상과 연결하는 동기에서 조금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미스테리아 50호》의 특집은 재난물. 《미스테리아》가 미스터리를 다루는 방식의 좋은 점은 그저 장르소설 안에만 머물지 않고 주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 넓혀 함께 다룬다는 점. 그것이 장벽이 될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을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번 호 특집에서 ‘범죄와 기후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들’ 같은 기사. 가장 마음에 들었던 꼭지는 정은지의 ‘컬리너리’인데 조지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작품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편 중에는 렉스 스타우트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제일 재밌었는데 사건 자체보다 네로 울프와 아처 콤비의 유머러스한 치고받기가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린 듯. 소개글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곳곳의 차별적 표현들은 감안해야 한다… 부디 51호도 즐거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시길!

개인 디지털 자료 창고랄까, 기록용으로 롬 리서치를 사용하다가 옵시디언으로 옮겼다. 옵시디언은 롬 리서치에 비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은 편이라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제텔카스텐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 글쓰기라든지 정보 관리와 비슷하다는 점에 끌려 숀케 아렌스의 『제텔카스텐』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제텔카스텐’은 여러 인덱스 카드를 모은 목록, 즉 메모 상자를 의미한다. 특히나 몇 년 전부터 장르소설 작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참고가 될 것 같아 읽어봤는데 “글쓰기는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생각 등 공감하는 점이 여러 군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