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올해의 미스터리 - 국내편
2025년 즐겁게 읽은 국내 미스터리. 해외 미스터리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매년 새로운 작가가 등장하고, 매년 더 재밌어지고 있다. 내년에는 더 재밌어지길!
- 현찬양, 『식탐정 허균』
- 배연우, 『탐정, 수정』
- 김진영, 『괴물, 용혜』
- 단요, 『트윈』
- 장다혜, 『탁영』
- 정해연, 『매듭의 끝』
- 도진기, 『법의 체면』
- 고수고수 외, 『제8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품집』
- 박하루,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
- 서미애, 『나에게 없는 것』
1.
『식탐정 허균』의 프로토타입 동명 단편이 《미스테리아》(41호)에 실렸을 때도 감탄했지만 이 작가의 필력은 진짜다. 단편일 때의 느낌은 작은년이가 화자로 독자의 멱살을 잡아 끌고가는 일인극 느낌이 강했다면 장편에 맞게 새로이 화자 이재영을 등장시켜 세계관을 재구성한다. 작은년이는 신 스틸러 조연으로 출격. 일단 허균과 재영과 작은년이의 캐릭터 조형이 훌륭하고, 식탐 콤비 허균-작은년이, 사건 콤비 허균-재영의 구도로 이어지는 세 사람의 균형도 좋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맛이 차져서 허균이 먹방을 찍을 때는 침을 흘리게 되고 사건이 벌어지면 곧장 몰입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화자인 재영이 참 마음에 든다. 다른 작품도 써야 할 테니 이 시리즈는 일 년에 한 권씩만 따박따박 내주면 좋겠다. (온라인 서점밖에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이 정도 재미를 가진 작품이 왜 이만큼의 반응밖에 얻지 못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2.
국내에서 이만큼 탄탄한 본격 미스터리라니, 『식탐정 허균』과 1위를 살짝 고민했다. 《미스테리아》에서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인 「탐정, 수정」과 두 번째 단편 「탐정, 지목」을 읽을 때만 해도 앞으로 두고 볼 만한 괜찮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탐정, 도서」가 확인 도장을 찍어줬다. 단행본으로 묶여 연이어 읽는 맛도 좋다. 국내 본격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글을 잘 쓰는 작가는 많지만 ‘본격’을 이만한 완성도로 이만큼의 재미를 주기는 쉽지 않다.
『탐정, 수정』은 빌런에 가까운 탐정과 추리하고 싶지 않아 하는 탐정의 콤비 조합이 참신하고, 이 콤비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메타 미스터리 설정을 작품 안에서(아니, 제목에서부터)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큰 즐거움. 이런 즐거움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이 앞서 얘기한 「탐정, 도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독자에게는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아쉬움도 있지만 본격 팬들은 비명을 질러야지……. 아직 풀어놓지 않아 그렇겠지만 아직까지 두 주인공의 관계에 충분히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단행본으로서 단편의 구성도 좀 아쉽지만, 캐릭터의 사연히 하나둘 드러나면서 작품의 세계관도 자리를 잡으면 잠재된 재미도 커지리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예진이랑 아현이도 많이 등장시켜주세요…….
3.
오랜만에 돌아온 김진영의 작품이라 반가웠다. 중간에 단편을 쓰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갈증을 해소하기 힘들었고. 『괴물, 용혜』는 미스터리라기보다 초자연 호러 장르에 가깝지만 작품의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 상징에 가깝기도 하거니와 사건의 내막을 쫓는 전개는 스릴러의 문법에 따르고 있어 랭킹에 포함했다. (어차피 맘대로면서 무슨 변명을…….) 장르 작가를, 장르를 쓰기 위해 쓰는 작가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장르를 쓰는 작가로 구분한다면 김진영은 후자일 텐데, 그것이 작품 안에서 작가만의 단단함으로 표현이 되는 듯하다. 『괴물, 용혜』는 한편으로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 생각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뜬금없지만 영화 엑스맨 시리즈도 떠올라서 좋았다.
4.
『트윈』은 읽으면서 참으로 묘한 인상을 받았다. 분명 스릴러의 설정과 전개인데 실제로는 스릴러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는 것 같은. 기본 설정은 이렇다. 쌍둥이 가운데 하나가 죽은 뒤, 남은 한 명이 죽은 한 명의 신분을 대신하기로 한다. 어째서? 아무리 쌍둥이라도 문제가 안 생기나? 분명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겠지……라는 예상과 기대는 대부분 맞지만, 영미 스릴러 같은 리듬감은 흐릿하다. 단요는 꽤나 특이한 방식으로 (이걸 작가주의라고 해야 하려나) 이야기를 서술한다.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다르지만 문장력이 좋아 나름의 가독성을 갖고 있고, 몰입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분량에 비해 그렇게 빨리 읽지는 못했다. 작가의 목소리가 모든 인물의 입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이게 딱히 부정적이기만 한 의미는 아닌데, 그럼에도 뭔가 독서 후에 계속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5.
베스트셀러인 『탄금』을 전자책으로 사두고 미루다 올해 드라마를 시작한다기에 다시 종이책으로 사서 읽었다. (참고로 드라마 <탄금>은 시청 포기.) 로맨스에 방점을 둔 작품인 줄만 알았는데 꽤나 스릴 넘치는 시대물이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국내 시대물에 걸맞은 맛깔나는 어휘와 문장으로 눈이 즐거운 작품이다. 마침 작가의 신작 『탁영』(<탁류> 아님 주의)이 나와서 냉큼 이어 읽었다. 미스터리성은 흐려지고 로맨스 느낌이 훨씬 강해졌지만 전작의 장점은 여전했고, 독살 미스터리를 파고드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미스터리 팬으로서는 그 부분을 확장해주었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이 많지만 여전히 몰입도가 좋아 독서의 아쉬움은 크지 않다. 다만 소설의 구성 면에서는 『탄금』의 그것을 답습하는 느낌이 강해 다음 작품의 성격에 따라 계속 읽게 될지 어떨지 고민할 것 같긴 하다.
6.
정해연은 매년 몇 편의 작품을 출간하는, 가장 꾸준하게 작품을 집필하고 일정 정도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미스터리 작가다. 정해연의 장점은 짧은 소개글만 읽고도 흥미가 동하는 설정을 잡아낸다는 점인데, 작년에 출간한 『누굴 죽였을까』와 『용의자들』, 그리고 올해의 『매듭의 끝』이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 세 작품 모두 재밌게 읽었고 독서 기록의 평점도 평균 이상인데, 고백하자면 작년의 두 작품은 기록을 읽지 않으면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매듭의 끝』도 위의 두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다. 재밌게 읽히지만 플롯과 캐릭터 조형은 다소 헐겁다. 킬링타임 미스터리로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면 대단하지 나쁜 일은 전혀 아니다. 모든 책이 영원히 기억될 필요는 없다. 즐겁게 읽고 버리는 책이 좀더 많아져야 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현 시점에서 정해연 작가라면 좀 더 욕심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홍학의 자리』가 작가에게 한 번의 전환점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작가 스스로 도약할 수 있을 만한 전환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뿐 아니라 편집자의 역할도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7.
『법의 체면』에 실린 단편이 모두 표제작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1위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겠다.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는 작가이니까 해볼 수 있는 고민, 해볼 수 있는 상상을 본격 미스터리의 범주에서 세련되게 풀어놓는 솜씨는 확실히 경험에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가, 싶을 만큼 훌륭하다. 국내에서 가장 단정한 단편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답다. 그에 비하여, (도전과 시도는 존중하지만) 애매하게 적용한 SF 설정의 작품을 포함한 나머지 수록작은 슬프게도 크게 즐길 수 없었다. 이번 단편집 수록작은 전부 다른 매체에 실렸던 작품이니 관심 있는 작품을 골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법의 체면」은 《미스테리아》 49호에, 「완전범죄」는 같은 잡지 38호에 실려 있다.
8.
처음 묶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품집. 《미스테리아》에 실리지 않은 후보작까지 같이 읽을 수 있어 재밌었다. 일단 대상으로 뽑힌 「거짓말쟁이 고리」는 설정이 재밌다. 탐정 주인공의 말이 너무 많은 것 빼면……. 약간 박하루 작가의 탐정 김재건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전작인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를 떠올려보자면 작가 스타일이 그런 듯?(웃음) 장편에서는 그런 장황스러움이 부담이기도 했지만 단편이라 특별히 단점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올해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교묘의 「승은만은 원치 않소」인데, 긴 이야기의 도입부 느낌이라 완결성이 떨어지는 단점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된 게 아닐까 싶다. 미스터리성이 약하기도 하고. 이 작가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기도 하여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부디,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완성해주세요. 황금펜상 수상작품집은 매년 12월 중순에나 나와서 내년에 리뷰로.
9.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을 읽으며 또 한 번 든 생각은, 미스터리에 대한 작가의 이해도도 높고 그것을 구현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도 알겠지만 그와 별개로 독자에의 접근성은 역시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 작풍을 바꾸기는 힘들겠지만 미스터리의 핵심인 추리 부분에서의 전달력에는 좀더 확실한 ‘친절함’을 장착하면 박하루 작가의 작품을 훨씬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이 더 독자 접근도가 좋다는 생각도 들고. 딱히 작풍이 아니더라도, 작가가 그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유머’는 텍스트로 표현하기 정말 까다로우니까.
10.
아쉽고, 아쉽다. 『나에게 없는 것』을 읽기 전, 하영 연대기 3부작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잘 자요, 엄마』는 이제 와 읽으면 흔한 설정일지 몰라도 정말 공들여 세심하게 쓰인 작품이고, 시간이 흘러 그 설정을 이어받은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없다』는 가정 스릴러로 변모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개인적으로 3부에서 기대한 것은 하영과 하영의 동생과의 관계였는데, 대부분의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지며 시리즈의 맥락에서 멀어진 점이 가장 아쉬웠다.
한편으로, 이번에 3부작을 다시 읽으며 눈에 들어온 것은 선경의 존재다. 범죄심리학자였던 선경이 2부에서 남편에게 휘둘리다가 3부에 와서는 심리 상담가가 되며 자신의 자리를 찾은 듯 보인다. 처음에는 범죄자를 상대하다가 나중에는 피해자를 상대하는 사람이 된다,는 지점이 1부의 선경에게서 느꼈던 위화감과 2부에서 그가 보인 행동에 설득력이 부여되며 비로소 선경이 어떤 캐릭터였는지 이해하게 되었달까. 비록 3부에서는 희주에게조차 밀려 존재감이 안개 속 그림자 같아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