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올해의 미스터리 - 구간편
신에게는 아직 읽지 않은 구간작이 무수히 남았소이다…….
- R. F. 쿠앙, 『옐로페이스』
- 벤 윈터스, 『라스트 폴리스맨』
- 헤르만 코흐, 『더 디너』
- 와즈디 무아와드, 『화염』
- 아마네 료, 『희망이 죽은 밤에』
- 시본 도우드, 『런던 아이 미스터리』
- 설레스트 잉,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 스즈키 고지, 링 시리즈
- 오쿠다 히데오, 『나오미와 가나코』
- 곤도 후미에, 『얼어붙은 섬』
1.
왜 자꾸 신작이 나온 뒤에야 첫 출간작을 읽게 되는가……. 작년에 동료 디자이너에게 추천을 받아 읽으려고 사두었다가 해가 바뀌어 신작이 나오고서야 읽었다. 죽은 사람의 원고를 훔친다는 단순하면서도 궁금증을 자극하는 설정에서 시작한 『옐로페이스』는 우와, 감탄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사회 현실과 문화 현상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느낄 수 있다……고 쓰면 너무 보도자료 같은데.
가장 인상 깊은 한 가지만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제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싶을 만큼 작가를 둘러싼 출판 산업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죄 파헤치고 있다는 것. 구체적인 사실은 우리와 다른 점이 많겠지만 아마 이걸 국내 버전으로 바꾼다면 꽤나 논란이 될걸? 업계에 몸을 담은 처지라 더욱 생생하고, 더욱 짜릿하다. 책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빠져들 책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전방위로 날아드는 작가의 펀치가 정신을 쏙 빼놓는다. 새로운 작가의 발견. 올해 나온 신작 『바벨』은 미스터리라기보다 SF 판타지에 가까운 모양이지만 독서 대기 책장에서 출격 준비 중이다.
2.
종말을 코앞에 둔 세상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인가. 잔뜩 기대를 하며 읽은 아라키 아카네의 『세상 끝의 살인』은 ‘작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만 들었을 뿐 배는 부르지 않았다. 대신 발견한 책이 『라스트 폴리스맨』이다. 『세상 끝의 살인』에서는 찾지 못했던, ‘어차피 모두 다 죽을 목숨, 누가 대체 왜 범죄를 저질렀는가’ 또한 ‘주인공은 왜 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하드보일드다. 이런 멋진 작품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결코 멋지다고 할 수 없는 세기말적인 제목과 칙칙한 표지가 한몫했을 테지만. 그래서인지 다음해에 『모두의 엔딩』이라는 제목으로 표지갈이까지 하여 재출간되었지만 여전히 콘셉트는 알 수 없다. 총 3부작이고 책을 구하기도 힘들어 2부는 아직 독서 전인데 아쉬운 번역을 새로 하여 새 판본이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3.
『더 디너』는 영화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책이다. 해외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진 모양이지만 국내에서도 <보통의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작년에 개봉한 작품. 영화는 번듯한 삶을 꾸리고 있는 두 형제 부부가 저녁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물 아래로 흐르던 갈등이 증폭되는 과정과 이들의 대처가 스릴러의 문법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시점은 이들 가족 자체에 맞춰져 있지만 원작인 『더 디너』는 형제 중 한 명인 파울 로만의 시점에서 그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벌인 일을 대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만의 과거도 함께 보여주며 그의 사고 안으로 점점 깊숙이 파고드는데, 그러면서 로만이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해를 할수록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 언뜻 소년범죄의 내막을 다루는 소설인가 싶다가 중간쯤부터는 심리 스릴러로 전환하는데 장르소설로서의 스릴러가 아닌데도 쫄깃할 만큼 스릴이 넘친다. ‘더 디너’라는 제목에 걸맞게 각 챕터는 아페리티프,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디제스티프, 팁까지 이어지는 디너의 코스명을 따르고 있다. 이게 그저 제목에 따라 적당히 붙인 게 아니라 전개되는 상황에 어찌나 찰떡처럼 잘 맞아떨어지는지, 작가의 구성력에 더욱 감탄했다.
4.
이리저리 미스터리를 찾아 읽다 보면 안 좋은 게 옆에 읽을 책이 쌓여 있음에도 파면 팔수록 재밌어 보이는 책이 자꾸 늘어난단 말이지. 난 희곡은 도무지 적응 못 하는 독자라고 생각했다. 『화염』을 읽기 전까지. 무슨 기사를 읽다가 꽂혀서 읽어보자 마음은 먹었지만 그래서 살 생각은 안 하고 (얇기도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런데…… 뭐지, 이 작품? 미스터리도 아니고 심지어 소설도 아닌데 잡아끄는 이 몰입력의 정체는 대체.
물론 어머니가 죽으며 남긴 유언장의 내용이 미스터리 독자의 눈을 확 잡아끌긴 하지. 딸에게는 아버지에게, 아들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형제에게 남기는 편지를 각각 전달하라는 유언이라니 이게 무슨 의미지? 유언의 비밀, 우리 좋아하잖아요……. 뭐, 코난이나 김전일처럼 흘러가진 않겠지만. 솔직히 읽기는 여러 의미에서 까다롭고 레바논 내전에 대해서도 찾아보며 읽는 과정은 번거롭기도 했지만 이런 작품도 있구나 싶은 동시에 이것도 훌륭한 미스터리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5.
신작인 『공감각 아름다운 밤에』가 나왔기에 작년에 나온 『희망이 죽은 밤에』를 읽었다. 이쯤 되면 신작이 나와야 전작을 읽는 것은 습성이라고 해야 할까……라기보다 더 흥미를 끄는 신작을 먼저 읽긴 했다. 음, 발상과 본격 미스터리로의 접근 방식은 신선했지만 메피스토상 수상작답게 다소 튀는 캐릭터와 과하다 싶은 세계관이 나랑은 잘 맞지 않았고, 이어서 사두었던 책을 읽었는데 이게 취향 저격.
소년범죄에 특별히 능력을 발휘하는 경관(초반 인상은 별로였지만)과 노련한 형사의 조합도 나쁘지 않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아이들이 발버둥쳐야 하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메시지에만 몰두하지 않고 본격물의 재미를 불어넣는 플롯과 과하지 않은 반전까지 좋았다. 미스터리 독자의 눈에 밟힐 만한 작품인데 장르 전문 출판사가 아닌 데다 제목을 포함하여 책의 전반적인 외양이 흐릿한 것이 약점이 된 듯.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작품을 읽고 나니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떤 색인지 궁금해졌다.
6.
『런던 아이 미스터리』는 좋은 청소년 소설은 어른이 읽어도 재밌어야 한다는 말의 본보기 같은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 청소년 소설도 책에 따라서는 책표지부터 ‘난 나이 어린 독자용’이라는 내색을 좀 덜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주인공인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데도 재밌게 읽었다. 무엇보다 대상이 어리다고 추리나 논리가 허술하지 않고, 전개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덜하지도 않다. 아스퍼거 증후군인 소년이 주인공이나 그 특징을 과장하여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않는다. 포장을 새로이 해서 일반 독자들도 같이 읽으면 좋을 텐데.
7.
누가 이 책을 모성과 양육, 계급과 인종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해줬다면 아마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맞긴 하지만 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소재로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마도 디즈니플러스에 들어온 드라마 1화를 보고 나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1화의 무엇이 방아쇠였는지 기억에 없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되는데, 동시에 제목만 봐도 울컥하게 하는 게 있다. 미국 사회의 일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올해 읽었던 S. A. 코스비의 『죄를 지은 모두 피를 흘리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둘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서로 다른 재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렇게 전작 독서를 하고 싶은 작가가 또 는다.
8.
어쩌다 한 채널에서 <링 2>인가 <링: 라센>의 한 장면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나서 <링>을 보았다가 생각보다 낡지 않았을뿐더러 새로 재밌어져서 며칠에 걸쳐 영화 시리즈를 전부 보고 말았다. 희화화된 사다코밖에 알지 못한다면 꼭 한번 보길 바란다. 아무튼 그러고 났더니 원작이 땡겨 스즈키 고지의 링 시리즈를 전부 구입해버렸다. 영화도 비슷하지만 소설도 뒤로 갈수록 평가가 박한 편인데, 영화에 힘입어 출간되었을 당시에 읽었을 때만 해도 내 감상도 비슷했다. 그런데 웬걸, 20년도 지나 다시 읽은 링 시리즈가 이렇게 재밌다니. 아니, 첫 편인 『링』은 원래도 재밌었지만 후속작이 이렇게 재밌었나?
이제는 흔해진 ‘전염되는 저주’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링』은 여전히 흡입력이 있었는데, 이게 2편과 3편으로 이어지면서 세 작품이 그야말로 ‘원’을 그리듯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초자연 호러였던 『링』은, 『링 2 - 나선』에서 메디컬 사이언스 호러로, 『링 3 - 루프』에서는 가상현실로 점프하며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 형태다. 시리즈 뒤로 갈수록 SF적인 설정이 덧붙여지며 나중에는 허황한 설정을 갖다 붙였다고만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매우 쳤다……. 현지에서는 후속작 『에스』와 『타이드』까지 나왔던데 궁금하다, 궁금해.
9.
원작이 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면 원작부터 찾아 읽는 편이지만 플롯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 작품도 드라마화된 <당신이 죽였다>를 먼저 보고 읽으려고 했는데 1화의 학대 장면을 참고 볼 수 없었다……. (울음) 그런 거 구체적으로 안 보여줘도 감정이입하고도 남으니까 스토리를 진행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래서 드라마는 1화에서 하차하고 『나오미와 가나코』를 들여다봤다.
이 책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되었고,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들을 재밌게 읽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 데다 저 작품이 나올 당시 가정폭력을 소재로 하는 작품에 지쳐 있어서 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밀리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재밌게 읽었다. 스토리는 예상대로 흘러가지만 예상만큼의 재미도 있는 편. 하지만 스토리보다 눈에 들어온 건 캐릭터 조형이었는데, 나오미를 예로 들면 그의 모습을 좇는 것만으로 백화점 외판부가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고 그 안에서 나오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처음에는 학대를 거부하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가나코가 어떻게 나오미의 의지에 이끌려 더 적극적으로 변해가는지 시점이 변하면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전개는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경지. 그 외 조연이 되는 인물을 포함해 캐릭터 조형의 모범이 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덕분에 제법 두꺼운 분량에 대강 예상이 되는 스토리인데도 꽤 현실감이 흘러넘쳐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10.
해외편에서 『인플루언스』를 이야기하면서도 언급했지만 곤도 후미에는 올해 재발견한 작가 가운데 한 명. 그중에서도 『얼어붙은 섬』은 첫인상과는 딴판의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재독하면서, 처음 읽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에서 신작과 비슷한, 작가 고유의 작풍을 데뷔작에서 발견했다. 처음 읽을 때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본격 미스터리인 줄로만 알았지……. 이제사 읽으니 섬세한 곤도 후미에의 터치가 너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