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올해의 미스터리 - 해외편 11~20위

재밌는 작품이 많은데 10위까지만 하면 아쉬워서 20위까지.

2025 올해의 미스터리 - 해외편 11~20위
  1. 사쿠라다 도모야, 『매미 돌아오다
  2. 매슈 블레이크, 『안나 O
  3. 크리스 휘타커, 『나의 작은 무법자
  4. 이마무라 마사히로, 『디스펠
  5. 탐낌,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6. 엘리스 피터스,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
  7. 곤도 후미에, 『인플루언스
  8. 가미나가 마나부, 『라자로의 미궁
  9. 아오사키 유고, 『지뢰 글리코
  10. 질리언 매캘리스터, 『또 다른 실종자

11.

노리즈키 린타로의 ‘왓더닛’이라는 말에 혹해서 본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나다……. 결과적으로는 요즘 트렌드랑은 조금 다른 본격 미스터리를 즐겼다. 첫 단편만 읽고는 뭐지 싶었지만 단편이 이어질수록 이 작품집의 방향성을 이해하면서 재미가 늘어난 편이라고 할까. 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매미 돌아오다』를 읽으니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작가 신작 계속 소개될 것 같은데 기대할 만하다. 역시 단편만이 줄 수 있는 미스터리의 재미가 있단 말이지.

12.

살인 용의자가 현장에서 잠들어 4년간 깨어나지 않아 당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이 즐거워 읽기 시작했지만 꽤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평범한(?) 스릴러라고 생각했다. 체념 증후군이라는 증상과 잠에 대한 여러 지식을 알게 되는 정도 말고는, 재미가 없진 않지만 설정 외에 이렇다 할 특징을 잘 모르겠는. 그런데 『안나 O』 는 ‘후반전에 모든 것을 건다’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와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는데 훨씬 작위적이라 전체적으로는 감흥이 덜한 편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누군가의 ‘서명’이 딱 등장하는 장면에는 감탄했다. 어떤 독자에게는 반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3.

나의 작은 무법자』는 도입부에서 이미 멱살을 확 잡아채버렸다.

뭔가 보이거든 손을 드세요.
담배 껍질이든 음료수 캔이든 상관없습니다.
뭔가 보이거든 손을 드세요.
건드리지도 마시고요.
그냥 손만 드세요.

으아. 미스터리나 스릴러로서의 감흥은 크지 않았지만 읽다 보니 작가의 손에 멱살을 잡힌 채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더치스와 워크의 관계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엘리와 조엘의 관계에 겹치면서 울컥하고 말았다. 더치스 잘 살아야 해……. (울음)

14.

올해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을 다시 읽었다. 외부인이 되어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다시 읽으니 이 작품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 오히려 눈에 잘 들어온다. 이마무라 마사히로가 마음에 드는 점은 본격 미스터리를 쓰면서도 트릭이나 미스터리적 장치에 함몰하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 안으로 잘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은 퍼즐(퀴즈)이 아니다. 『디스펠』에도 그런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초등학생이 주인공이라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보다는 모험물에 가까운 독서 경험을 주긴 하지만 오컬트파와 논리파, 미스터리 팬(미스터리 팬과 논리파를 구분하여 캐릭터를 만든 것도 재밌다)의 삼각 구도의 조합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 『허구 추리』와 미쓰다 신조의 민속학 미스터리가 오묘하게 섞인 느낌도 있다. 아쉬운 것은 다소 뜬금포 같은 진상.

11월에 나온 『시인장』의 스핀오프 『탐정 아케치는 사건을 찾아 달린다』도 좋다. 소품이라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단편별로 활용하고 있는 미스터리의 소재와 장치 들이 튀지 않으면서도 스토리 안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아주 즐겁다. 두 작품을 여기에 공동으로 올려도 좋겠다.

15.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제목만 보고 일본 미스터리에서 흔했던 ‘일가 연쇄살인물’인가 싶었으나 그냥 한 집안의 여러 인물이 죽는 게 아니라 ‘쓰우’라는 성씨를 다 죽이는 얘기였다……. 물론 쓰우가 희소 성씨라 전 세계를 통틀어 수십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정이지만 그래도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싶은 생각부터 든 것이 사실. 그런데 작품의 방향은 범죄를 어떻게 저지르고 트릭을 어떻게 밝히는지가 아니라 홍콩의 정권 제도를 중심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면면을 파고든 사회 비판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찬호께이와는 다른 방면으로 홍콩 사회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어 신선했다. 복수 3부작 중 한 권인데 나머지도 다 나오려나.

16.

캐드펠 시리즈는 복간만으로도 축하를 해야 마땅하리. 예전 판본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지만 예전보다 텍스트도 잘 정돈되어 있고 지도 등도 보기 좋아져서 새 판본으로 읽는 맛이 좋다. 무엇보다 미출간이었던 시리즈의 프리퀄 단편집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이 포함되어 독자로서는 만족도 증가. 디자인도 세련되어졌지만 조금 더 말랑말랑하게 포장되어 좀더 많은 새 독자를 끌어들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은 한 푼.

17.

올해 재발견한 작가 가운데 곤도 후미에가 있는데, 청탁 원고 때문에 읽기 시작한 『인플루언스』가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데뷔작인 『얼어붙은 섬』을 다시 읽었다가 당시 독서와는 완전히 다른 감흥을 느꼈다. 『인플루언스』는 묘하게 익숙한 일본 미스터리의 얼개를 갖고 있기에 초반에는 곤도 후미에가 요새는 이런 색깔의 작품을 쓰는구나 싶다가 후반부로 넘어가 작가의 의도가 밝혀지면서 ‘아, 곤도 후미에는 이런 작가였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여성) 인물의 심리를 (여성 독자가 아님에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미묘한 지점까지 건드린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와 그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감정에는 끈적함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끈적함으로 이어지는 관계들.

18.

출발은 『기암관의 살인』을 연상시키는 추리 게임처럼 미스리딩해놓고 다른 곳으로 이야기를 이끌더니 모 영화의 핵심 트릭을 가져와 썰을 푼다. 영화를 카피한 것 같은 설정 때문에 실망한 독자도 있는 것 같지만, 영화가 오로지 하나의 진상만을 위해 질주한다면 『라자로의 미궁』은 다른 서브 플롯과 결합하여 다양한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에 맞춰 여러 진상을 추측하는 재미를 주었다는 점이 즐거웠다. 덕분에 제목 자체가 큰 스포일러가 될, 이제 클래식이 된 반전 스릴러 영화를 한 번 더 감상한 것도 좋았고.

19.

굳이 설명하자면, 미스터리 팬에게 올해의 최고 주목작이었던 『지뢰 글리코』의 순위가 이렇게나 아래에 있는 건 역시 취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다 읽고 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인가 하는 의문이었는데, 그게 순위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작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도 없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건이 아니라 게임일망정 감추어진 ‘비밀’이 있고 그것을 파훼하는 방법이 논리적 사고라는 것, 승리하기 위해 게임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미스터리 장르든 아니든 재미만 있다면 상관없지 않나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카케구루이』 같은 도박물도 재밌어라 읽는 독자이니까 말이다. 미스터리에서도 ‘규칙물’—이런 말은 없지만 풀어 얘기하자면, 특정 규칙이나 논리로 이루어진 세계관을 가진 특수설정이나 금기가 되는 규칙을 소재로 하는 공포물 같은, 규칙이 핵심 소재로 작용하는 작품 —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고로 그럭저럭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역시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다.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미스터리가 주어진 단서로 해답을 찾아가기에 실패하더라도 나름의 논리를 구축하며 따라가는 형태의 독서가 되기 쉽다. 하지만 『지뢰 글리코』의 경우 주어진 단서가 아닌 주어지지 않은 단서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게임이 거의 대부분, ‘무엇이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규칙’인지에 대해서는 가능성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고 거기에 ‘심리전’까지 보태면 추론(추리)의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런 의미에서 제일 단순하다고 할 표제작인 「지뢰 글리코」가 제일 재밌었고, 본문의 묘사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은 「포 룸 포커」의 감흥이 제일 덜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참신한 게임을 바탕으로 그 게임의 허점을 어떻게 이용해 승리할까를 되풀이하는 형태이기에, 미스터리의 반전에 해당하는 이 부분을 즐기는 독자는 재밌어하겠지만 ‘사건의 부재’에서 이어지는 ‘서사의 부재’가 내 독서 경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해야겠다. 서사가 흐릿하니 서사를 뒷받침하는 캐릭터의 존재감도 흐릿하고. 도박물과 본격 미스터리라는 관계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긴 한데, 그러고 보니 어쩌면 『지뢰 글리코』는 혼자 읽기보다 같이 읽고 수다를 한참 떨어야 더 재밌어지는, 또는 ‘씹으면서 즐거워지는’ 종류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순위는 19위에 달아두었으면서 리뷰도 아닌 주제에 수다가 이렇게 길어졌으니! ㅋㅋ

20.

질리언 매캘리스터의 작품은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에 이어 두 번째인데, 별다른 생각 없이 ‘그래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만으로 책장을 폴폴 넘기게 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작품으로 벌써 작가를 정의하기는 이르지만 결말의 의외성을 기대하게 하며 가독성에 포커스를 맞춘 스릴러라는 점에서 할런 코벤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실종자』에는 세 명의 부모가 화자로 번갈아 등장하는데 각각 가해자인 어머니, 실종자의 아버지, 용의자의 어머니다. 이 중 한 명은 경찰이고, 이들은 같은 사건에 얽혀 있긴 하지만 가해자와 용의자와 실종자가 각각 일대일대응하는 건 아니다……라는 것이 작품의 묘미다. 후반부로 가며 팽팽하던 긴장감에 힘이 빠진 건 아쉽지만 말이다.